케이팝 속에서 움튼 ‘팝’의 새로운 정의 [K콘텐츠의 순간들]

ai주식/주식ai : 케이팝이 팝다워졌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이 이야기에 시동을 걸기 위해서는 ‘팝(pop)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정된 지면을 고려해 이 글만을 위한 ‘팝’을 빠르고 쉽게 재정의해본다. 적어도 2023년 케이팝에서 자주 언급되는 ‘팝’은 ‘빌보드 차트를 중심으로 영미권에서 유행하는 음악’의 의미에 가깝다. 주말마다 노트 뒷장에 ‘아메리칸 톱 40’을 역순으로 받아 적던 사람들부터 ‘느낌 있는 요즘 팝 플레이리스트’를 찾아다니는 사람까지 아우르는 사이, 추상적이지만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음악. 그게 바로 케이팝 속 움튼 ‘팝’의 정의다.

ai 투자 : 이러한 움직임이 가속화된 건 당연하게도 BTS의 첫 영어 싱글 ‘다이너마이트(Dynamite)’의 성공 이후다. 물론 이전에도 케이팝 안에서 (이 글에서 정의한) 팝을 소화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음악적 또는 문화적 요소의 멜팅폿(melting pot·용광로)과도 같은 케이팝이 어린 시절부터 학습된 영미권 문화에 대한 동경을 부러 외면할 리 없었다. 일례로 한동안 케이팝 ‘3대 기획사’로 불리던 SM, JYP, YG 엔터테인먼트 모두 영미권 팝의 커다란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지금까지도 ‘SM 음악’ 하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프로듀서 유영진이 1990년대 서구를 중심으로 서서히 달아오르던 팝 R&B 물결을 한국 대중음악에 일찌감치 도입한 선구자적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상대적 후발주자였던 JYP와 YG는 좀 더 본격적이었다. 솔로 가수 시절부터 1970년대 솔·펑크를 중심으로 한 흑인음악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으며 스스로를 ‘아시안 솔(The Asian Soul)’이라고까지 명명한 JYP의 수장 박진영은 레이블의 음악적 유산에서 미국 시장 진출 의지까지 영미권 팝 시장을 향한 사랑과 관심을 단 한 번도 숨긴 적이 없다.

YG가 거둔 성과는 더 뚜렷했다. 사실 BTS가 영미권 음악시장의 문을 완전히 열어젖히기 전, 영미권에서 거의 유일하게 유의미한 성과를 얻어낸 게 YG였다. 지금까지 레이블의 명성을 있게 한 두 축, 빅뱅과 투애니원(2NE1)은 힙합과 일렉트로니카를 기반으로 케이팝이 아시아권을 넘어 영미권 팝 시장에도 통할 수 있다는 손에 잡히는 증거였다. 빅뱅은 디플로(Diplo), 플로 라이다(Flo Rida) 같은 2010년을 전후로 한 팝 신을 뒤흔들었던 이들과의 협업은 물론 패럴 윌리엄스나 그라임스(Grimes) 같은 팝스타들의 러브콜을 꾸준히 받았고, 투애니원의 씨엘(CL)은 2018년 블랙 아이드 피스(The Black Eyed Peas)의 신곡 ‘도프니스(Dopeness)’에 참여하며 케이팝과 팝의 새로운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케이팝 담론 초기 제이팝의 영향이 자주 언급되었지만, 음악적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제이팝만큼이나 강하게 작용한 것이 영미권팝 음악에 대한 끝없는 추구였던 셈이다.정국의 첫 솔로 앨범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

이후 대중음악 역사에 길이 남을 BTS의 성공으로 맞이한 케이팝의 거스를 수 없는 해외 진출 흐름 속에서 ‘다이너마이트’는 또 다른 의미로 케이팝의 한가운데에 대형 폭탄을 떨어뜨렸다. 너무 큰 성공을 거두었기에 많은 이들이 잊고 있지만, 이 곡은 BTS로서도 모험에 가까운 노래였다. 앨범 단위의 메시지를 쭉 던져온 이들이 디지털 싱글로 처음 대중에 가볍게 다가간 곡이고, 영어로만 이뤄진 가사도 처음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당시까지 이들이 충성도 높은 팬덤을 모은 요인으로 분석되어온 모든 것에 반하는, 상당히 과감한 시도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성공이 남기고 간 흔적은 비단 BTS가 가는 길에만 있지 않았다. ‘다이너마이트’의 성공 이후, 국내에서 활동하는 아이돌 그룹 가운데 선공개 곡이나 수록곡, 스페셜 싱글로 영어 곡을 내는 일은 너무나 흔해졌다. 그리고 그런 영어 곡들의 대부분은 ‘다이너마이트’가 그랬듯 우리가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팝 그대로의 팝’이다. ‘요즘 뜨는 팝’ 플레이리스트에 슬쩍 끼워 넣어도, 빌보드 싱글 차트 어딘가에 몰래 넣어 놓아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정교하게 잘 만든 팝이 케이팝 안에서 무럭무럭 생명력을 얻기 시작했다. 몬스타엑스의 ‘레이트 나이트 필스(Late Night Feels)’를, 부석순(세븐틴의 유닛)의 ‘7시에 들어줘’를, (여자)아이들의 ‘아이 원트 댓(I Want That)’을 듣다 보면 케이팝과 팝을 굳이 구분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미련하게 느껴질 정도다.

여기에 얼마 전 BTS 정국이 발표한 솔로곡 ‘세븐(Seven)’과 ‘3D’를 들으며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두 곡은 마치 이제는 케이팝 안에 ‘관념적 팝’이 어떻게 담겼는지를 반복해서 말할 때가 아니라, 지금의 팝 시장에 케이팝이 어떤 식으로 녹아 들어가고 있는지 논의하는 쪽으로 가지를 뻗어야 할 때가 왔다는 신호탄 같았다. 이미 다수의 국내외 언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국이 앨범 발매 전 선공개한 두 곡은 영미권 팝의 직간접 영향 아래 평생을 살아온 이들이라면 누구나 동물적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븐’은 전 세계는 물론 한국에도 뜨거운 UK개러지 붐을 몰고 왔던 영국 출신 싱어송라이터 크레이그 데이비드를, ‘3D’는 넵튠스(The Neptunes)와 팀발랜드(Timbaland) 등 21세기 초를 호령하던 천재 프로듀서들과 함께 기막힌 호흡을 보여주던 시절의 저스틴 팀버레이크를 연상케 하는 음악이었다. 21세기 들어 악동 이미지나 머니 스웨그에서 벗어난 산뜻한 팝 스타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 팝 시장의 빈틈을 정국이 제대로 파고들 수 있을까. 곧 뚜껑을 열 정국의 첫 솔로 앨범 〈골든(GOLDEN)〉에 남다른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기자명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다른기사 보기 [email protected]#정국#BTS#GOLDEN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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