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마르고 예쁜 여성이 되려는 게 아니에요”

큰사진보기 ▲ ‘섭식장애 인식주간’ 세션1 섭식장애 당사자 8명이 모였다. ⓒ 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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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을 많이 해야 한다고 그래서 감자탕을 먹고 왔다.감자탕을 먹는데, 다들 ‘보기보다 잘 드시네요’라고 말한다. 나에게는 굉장히 큰 발전이다. 그간 먹는 게 어려워서 사람들을 피하려고 했다. 가장 몸이 안 좋았을 때 28kg이었는데, 아빠도 딸을 잃겠다고 생각했단다.”

30년간 섭식장애를 겪은 이은아(50)씨의 말이다. 지난 28일 오후 7시, 작년에 이어 올해 ‘섭식장애 인식주간’이 서울에서 열렸다. 이번 행사는 인제대 일산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율리 교수와 비영리단체인 잠수함토끼콜렉티브가 공동으로 개죄했다.인식주간 첫 날인 이날 마련된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토크’에는 10~30년간 섭식장애를 겪은 당사자 8명이 2시간 30분 동안 한 차례도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남자에게 사랑받으려 섭식장애? 그건 아니에요”

서울아산병원 질환백과에 따르면 섭식장애란 정신적인 문제로 인해 음식 섭취에 장애가 생기는 질환이다. 대표적으로는 거식증과 폭식증이 있다. 이미 한국에서 섭식장애는 그리 드물지 않은 병이 됐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8~2022) 식이장애로 진료받은 환자는 총 5만1253명이고 이중 80%가 여성이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최근 섭식장애는 10~20대 여성들이 급격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며 특히 2022년 폭식증 진료를 받은 20대 여성은 2018년보다 6.2배가 늘었다.

하지만 섭식장애 전문 입원병동은 서울에 2000년대 잠시 문을 열었다가 지금은 전부 사라진 상태다. 성악을 전공해 6년간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던 이은아씨는 이 시기에 2년간 입원병동에서 치료를 받았다.이씨는 “내 삶에서 병원을 떼놓을 수 없고, 많이 나아진 지금도 외래 치료와 약물 치료를 병행하고 있다”라며 “여기 계신 분들은 30년까지는 (섭식장애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독려했다.
큰사진보기 ▲ 이날 참석자 박채영씨가 출연한 영화 도 소개됐다. ⓒ 필름다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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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널들은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며 단일한 배경으로 섭식장애가 시작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박채영(31)씨는 “남자들에게 사랑받는 마르고 예쁜 여성이 되려고 섭식장애가 시작하는 것은 아니”라고 외치면서 기존의 통념이 잘못됐음을 반박했다. 이선민(30)씨는 여기에 “섭식장애가 보통 자해 행위로 해석되기 쉬운 것 같은데, 그보다는 나를 완벽히 통제하면서 목표를 달성하는 행위에 더 가깝다”라고 말했다.

곽예인(29)씨도 “다양한 원인이 겹쳐서 섭식장애가 시작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아이돌 연습생 당시의 경험이 시작이었다. 아름다워지고 싶거나 사랑받기 위해서 다이어트를 하다가 섭식장애가 시작되는 경우도 있으니 여성의 외모가 자본이 되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굶기를 선택한 여성들이 있다는 걸 놓치면 안 된다”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전시하고 호기심으로만 대하는 언론에 관해서도 성토했다. 박채영씨는 “대부분 기자들은 내가 증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기를 원했고, 몇 킬로까지 빠졌는지, 무슨 약을 먹었는지, 하루에 몇 번 토해봤는지를 물으며 내가 나를 얼마나 가혹하게 대해봤는지를 알고 싶어한다”라며 “비슷한 말을 반복하다가 1~2시간이 지나가고 그 외에 다른 질문은 나오지 않는다”라고 비판했다.

“귀신 씌였다고 굿… 가족들에겐 영원한 환자”

섭식장애 질환자들은 가족과 의료진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진솔(31)씨는 “중학생 때부터 먹고 토했기에 일찍 발각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가족들이 귀신에 씌였다면서 굿도 했다”라며 “대학을 졸업하고 7년간 집을 떠나 섭식장애 당사자 유튜브 영상을 만들고, 병원 치료와 상담을 받고 동료들도 만나면서 나아갔는데, 집으로 돌아가면 저는 여전히 ‘먹고 토하는 사람’이었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부모님은 ‘네가 10년 넘게 먹고 토했는데 쉽게 나을리 없다’라면서, 잘 먹을 땐 ‘먹고 토할 거지?’라는 물음을, 안 먹을 땐 섭식장애 재발을 의심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이씨는 “부모님들이 계시다면 꼭 말씀드리고 싶다. 여러분의 역할은 감시자가 아니고 섭식장애 당사자인 자녀가 영원히 낫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기억해주셨으면 한다”라고 조언했다.
큰사진보기 ▲ 섭식장애와 모녀관계를 그린 영화 (김보람 감독, 2022) 중 한 장면. 영화의 주인공인 딸 박채영이 과거를 회고하며 그린 그림이다. ⓒ 김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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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채영씨는 “의료진의 목소리가 한편으로는 가족들이 환자를 환자로만 고착화시키는 데 한 몫을 한다. ‘배가 부르다’라고 말하면, 많은 의료진이 이를 그저 ‘거식증의 목소리’로 치부하고 ‘목소리에 맞서 싸워야 한다’라고 생각한다”라고 지적했다. 섭식장애 전문 상담사 김윤아(33)씨도 공감하면서 “섭식장애 당사자인 우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유기체”라며 “엄마도 됐다가, 딸도 됐다가 환자도 됐다가 한다. 직업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각자 자기의 삶이 있다”라고 덧붙였다.

“섭식장애 나으면 정체성 잃어버릴까 두렵기도”

이날 토크에는 섭식장애 당사자들도 현장에 참석해 자신의 경험을 공유했다. “섭식장애가 낫게 되면 내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될까봐 두렵기도 하다”라는 한 참석자의 토로에 이선민씨는 “일상이 먹고 토하는 일에 맞춰져 있다 보니 만일 폭식과 구토가 없어지면 내 삶에서 무얼 해야 할까 무서웠다. 13년 동안 내 삶을 지탱해왔으니 내게서 질병을 빼놓을 수 없더라”라고 공감을 표했다.

아이를 낳은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이날 참석한 이씨는 ‘회복기’에 들어섰음을 밝히며 “처음으로 음식이 그저 내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음식을 꼭 필요로 하는 아이의 것이 된다는 생각이 드니 그때부터 삼시세끼를 열심히 챙겨먹을 수 있게 됐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폭식용 음식도 더는 끌리지 않고, 먹고 해소해야 인생이 충만하다고 생각했던 사고가 바뀌기 시작했다. 출산을 하고서 폭식과 구토를 하지 않는 놀라운 나날을 겪고 있다. 태어난 아이가 아프면 어떡하지 걱정을 했으나 굉장히 건강하고 최근 행복하다고 느낀다”라고 밝혔다. 참가자들도 섭식장애에는 다양한 회복 경로가 있음을 공감했다.

섭식장애 인식주간이란 한국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행사이지만, 영미권 나라에서는 1980년대부터 섭식장애 전문가, 단체를 중심으로 매년 이어지고 있다. 2023년에 이어 올해도 열린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은 지난 28일 시작해 오는 3월 5일까지 총 7일 간 서울 성동구 성수동 헤이그라운드 서울숲점 회의실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섭식장애 당사자 가족들의 이야기 모임(29일), 섭식장애를 둘러싼 의료 시스템을 논하는 자리(3월 1일) 등이 마련돼있다.
큰사진보기 ▲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EDAW2024) 공식 포스터. ⓒ 잠수함토끼콜렉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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