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계가 연구 대신 ‘국가 미래’ 걱정하게 만든 윤석열 정부

"저희 대학원생들은 정치 잘 모릅니다. 연구비 카르텔이 뭔지 모릅니다. 다만 저희는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예산부터 깎는 것,국가가 이공계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는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안병국 KAIST 대학원 부총학생회장

[미디어스=송창한 기자] 윤석열 대통령의 '카르텔' 한 마디에 예산 삭감 직격탄을 맞은 R&D(연구·개발) 현장에서 과학기술 분야 생태계 자체가 파괴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존 연구들이 물거품이 되는 것은 물론, 인재들이 이공계 자체를 회피하거나 떠나가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더불어민주당은삭감된 R&D 예산이 기존에 알려진 5조 2천억 원이 아닌 6조 5천억 원 규모라는 분석을내놓았다.

5일 민주당 민생경제위기책위원회는 국회에서 'R&D 예산, 현장의 목소리를 듣다'라는 주제로토론회를 개최했다.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정부가 야당과 전문가의 반대에도 감세기조를 이어가며 경제위기에 대응해야 할 재정적 수단을 스스로 묶어버리는 실책을 범하더니, 줄어든 세수를 지출감소로 모면하기 위해 손대지 말아야 할 R&D 예산에 손을 댔다"며 "미래를 위한 투자를 줄이는 것이고, 우리가 나아가는 혁신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과학기술계에서 '누가 이공계 오겠냐' '행정고시 보는 게 낫다'는 젊은 연구자들의 한탄이 나오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홍 원내대표는 "그동안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R&D 예산은 삭감하지 않았다. 국가의 미래이고, 미래 인재를 키우는 중요한 투자이기 때문"이라며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지 못할망정 그나마 있는 예산을 깎는 것에 대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반드시 바로잡겠다"고 했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민주당 간사 강훈식 의원은 R&D 예산 삭감 폭이 알려진 것보다 더 크다는 검토결과를 전했다. 내년도 정부 R&D 예산은 25조 9천억원으로 올해 31조 1천억원보다 5조 2천억원(16.6%) 줄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강 의원에 따르면 1620개 R&D 사업의 67%에 해당하는 1076개 R&D 사업예산이 감액됐으며 총 삭감액 규모는 6조 5천억원에 달한다.

강 의원은 "알려진 내용보다 감액된 금액이 더 많다. 과학·산업·기후대응 1조 8천억원, 국방·방사청·중기부·농업 분야 각 4천억원 이상 삭감됐다"며 "연구개발 특성상 종료 단계별 감액도 있을 것이다. 1990년 이후 R&D 예산이 처음 삭감된 만큼 민주당은 예산을 최대한 살려내겠다고 다짐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어진 토론에서 안병국 KAIST 대학원 부총학생회장은 이번 R&D 예산 삭감으로 인해 이공계 회피·이탈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안 부회장은 KAIST 대학원 총학생회가 매년 실시하고 있는 '연구환경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이공계 회피 현상을 설명했다. KAIST 대학원생 2천여 명이 응답한 실태조사 결과, '연구직 대학을 가겠다'(교수가 되겠다)는 응답률은 입학시점 61%에서 현재시점 32%로 반토막이 났다.

안 부회장은 "KAIST 학생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입학하고 있지만, 대학원생을 받을 수 있는 학교나 학생들이 선호하는 학교가 아니면 교수가 되더라도 연구를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R&D 예산을 깎는다. 학생들은 '우리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힘들겠구나' '공부해봤자 내가 기여할 수 있는 영역이 점점 줄어들겠구나'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안 부회장은 "R&D 예산이 줄어들면 학교참여 과제가 줄어들고, 부족한 예산을 메우기 위해 기업이나 외부과제를 많이 수주하게 될 것"이라며 "현재도 본인의 연구과제와 기업이 요구하는 과제가 달라 '내 연구에 방해된다' 느끼는 학생들이 있는데, 교수들이 기업과제를 많이 가져오게 되면 학생들은 어떻게 되겠나"라고 물었다.

이어확 국가과학기술바로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 공동대표는 "6월 기준 학생연구원, 포닥(박사후과정), 인턴 등 25개 출연연에 비정규직 연구원이 6700명 정도가 된다. 직접비로 인건비가 나가기 때문에, 예산이 20% 삭감될 경우 20%는 나가야 한다"며 "과기정통부가 학생 연구비에 문제 없도록 하겠다고 보도자료를 냈지만, 인건비는 안 주는데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기관이 미래연구비로 모아둔 연구개발적립금을 쓰라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대표는 "과기정통부 직원들, 기획재정부 직원들도 우려를 표하고 있는 상황이다. 과기정통부 장관, 용산에 몇 분 정도가 이걸 잡고있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그 분들이 전문가는 아니지 않나"라며 "31조원 예산을 불과 두 달 만에 이렇게 뒤엎으면 기존 연구결과까지 다 망가뜨리게 된다. 저희는 임금·처우가 깎일 때도 이렇게 모이지 않았다. 나라 걱정해서 이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성 전국과학기술연구전문노동조합 위원장은 "지금 언론에서도 많이 얘기하지만, 과학기술계에 효율성을 말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기초는 오래, 튼튼하게 닦아야 하는데 정부의 R&D 비판 논거는 '성과가 낮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은 당장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R&D 기획·설계를 길게 내다보고 짜고, 성과도 전문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정책을 내놔야 하는 것이지 2~3년 내에 성과 내놓으라는 식으로 '카르텔'을 운운하는 것은 맞지 않다"면서 "지하철이 시민의 발인데, 무임승차가 있다고 해서 '지하철을 끊어라' '지하철 횟수를 줄여라'하면 그 피해는 시민에게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이승복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교수(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 이사)는 대학에 지원되는 기초연구사업 예산이 급감하면서 기초연구 생태계 구조가 훼손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연구 저변에 해당하는 사업들이 중단될 예정이다. 이 교수는 이런 구조가 기초연구의 다양성을 훼손하고, 연구자의 연구기회를 박탈해 결과적으로 대학의 지식 창출 기능을 후퇴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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